상당히 긴 세월 동안 나는 자신이 성인 ADHD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의심했다가 잊었다가를 반복했다.
ADHD의 특징들은 잘 설명된 글들이 워낙 많기에 굳이 옮기지는 않겠다- 다만 언급하고 싶은 것은 그 대부분의 기능이 일반인들 또한 때때로 겪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자기 자신을 굳이 ADHD로 구분하는 것을 주저했다.
나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품성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곧 그것을 고쳐야 한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문제로 인식되지도 않는 것 때문에 편하고 늘어진 삶을 굳이 빠릿빠릿하게 재단하고 싶지 않았다. 부정적인 것들은 사소한 단점들일 뿐이고 긍정적인 것들은 남들을 훨씬 뛰어넘는 대단한 장점인 것으로 나 자신을 포장하여 '특별한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나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경제력 또한 이유의 하나였다. 막연하긴 하였지만 정신과 방문은 상당한 돈이 든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대학생 시절에는 현재의 상황조차 간당간당한데 안 그래도 힘든 부모님에게 손을 벌려 내 능력 부족을 확정짓는다는 것 자체가 죄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결국 여느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ADHD는 곧 내 관심사에서 멀어졌다. 이후에 다시 접할 때에도 결국에는 다른 관심사가 머리에 비집고 들어오면서 잊혀졌다. 어느 시점 이후로는 그 관심을 뭇 사람들이 흔히 빠지곤 하는 함정인 '자신의 결핍을 외부에서 찾는'것이라 생각하여 멀리하게 되었다. 차라리 부족한 사람이면 사람이었지 핑계를 대는 사람이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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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감하는 문제가 시작된 것은 3달 전이었다. 직장에서 직무이동을 받게 되었다. 비교적 여유로웠던 이전 직무와는 달리 시간 계획을 세워야 했다. 예상하지 못한 건들이 동시에 발생했고 그것을 제어해야 했다. 처음에는 자신만만하게 시작한 직무였지만 곧 한계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A건을 진행하던 중 B건이 발생하여 그것을 처리하고, B를 처리하던 중 C건이 발생하고, C건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D건을 처리해야 하고, D건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E건을 처리해야 하는데 이는 조율이 필요한지라 독단적으로 진행할 수 없는 일이고... 이런 식으로 한 번에 5~6개의 건을 처리해야 하는데 어디선가 막히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막히는 이유가 외부 요인에 의한 것이면 양반이고, 보통은 그냥 '복잡해서' '싫어서' 같은 시덥잖은 이유였다.
게다가 새로 진행하는 직무는 일을 빠르게 처리해야 했는데, 전월 말에 미리 준비를 끝내서 월초부터 신속하게 건들을 진행해야 했다. 전임자가 진행하던 업무에 더해 원래 진행하던 하는 업무도 진행해야 해서 시간당 진행해야 하는 일의 절대량이 많아졌다.
업무가 지연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며 업무 자체에는 익숙해졌지만 속도는 붙지 않았고 어딘가에서 막히게 되면 현실도피를 시작했다. 딴짓이 점점 늘어갔고 업무 스택이 4건 이상 쌓이면 잊어버리는 일들이 많아졌다. 괜히 허둥대는 일이 많아졌다.
남이 보기엔 업무 과중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 자신은 업무가 과중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충분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업무라고 여겼다. 오히려 일을 하면서 계속 딴짓을 하게 되는 것을 멈출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몇 분간은 일을 진행하다 다시 딴짓, 딴짓을 하다 다시 일, 일을 하다 막히면 또 딴짓, 딴짓을 하다가 정신을 차리면 또 밀린 일 중에 빨리 처리해봄직한 일을 골라잡아서 진행하고... 효율도 나빠질뿐더러 빨리 진행하는것이 중요한 직무 특성상 일 전체가 밀리게 되어 악효과끼리 시너지가 나는 식이었다.
이전에 하던 작업이 무엇인지 잊어버리는 것도 문제였다. 아까 물어 봤던 것을 다시 물어보는 일이 잦아졌다. 직장 동료가 나에게 아까 요청했던 건을 다시 확인하는 일도 잦아졌다. 몇 건의 일이 겹치다가 막히게 되면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중요도에 관계없이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붙잡고 진행하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업무 효율이 저하되기 시작했다. 빨리 진행되어야 하는 일들은 내팽개쳐졌고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물론 전부 중요하긴 하다) 일들만 진행되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개선하기 위해 일들을 메모하기 시작했지만 별다른 개선 없이 책상 위에 광활한 메모지의 바다가 펼쳐질 뿐이었다.
어릴 때부터 지병 수준으로 갖고 있는 불면증이 이런 증세들을 더 가속시켰다. 회사에서의 보상 심리로 집에서 깨어 있는 시간이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어쩌다 일찍 자는 날이 생겨도 얼마 못 가 다시 새벽 3시나 되어야 잠드는 삶으로 돌아왔다. 어쩌다 새벽 5시까지 자는 게 밀리기라도 하면 다음날은 거의 살아있는 좀비 수준으로 회사에서 간신히 앉아만 있는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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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지인의 추천으로 정신과를 방문하게 되었다. 불면증과 지금 겪고 있는 업무에서의 불편을 상담하고, 이 참에 ADHD 관련까지 합쳐서 결판을 짓기 위해 방문했다. 사실 이 시점에서 이미 ADHD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내면으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렇게 생각해 오긴 했지만 나에게는 공인된 지표가 필요했다(증거 없는 확신은 망상에 불과하므로). 진료실에 들어가서 소상히 증세를 읊는 나에게 내려진 의사의 첫 판정은 번아웃 증후군이었고, 나는 의사에게 대들듯이 ADHD인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을 꺼냈다. 이런저런 증세를 더 이야기하자 의사는 신중하게 검사지를 넘겨주며 성인 ADHD 판정은 신뢰도가 낮은 편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사람 안달나게 하는 말이었다. 정신과에 오면 검사와 함께 ADHD인지 아닌지 O X로 판별해 줄 것만 같았는데 한 주를 더 참아야 되면서 약은 그냥 수면제 하나라니. 또 일주일이나 기다려야 ADHD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니.(참고로 신뢰도가 낮은 이유는 아동기, 5~11세 때의 기록이 정확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기억은 희미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ADHD 환자들은 대부분이 다른 병력을 갖고 있으므로 그것 또한 고려해야 한다)
결국 첫 날에 받은 것은 소량의 수면제 처방과 DIVA-5 검사지가 전부였다. 수면제는 다소의 도움은 주었지만(잠드는 시간이 새벽 3시에서 1시 반 정도로 당겨지긴 했다) 확실히 개선된다는 느낌은 그다지 없었다.
검사지는 양이 꽤 많았다. 성인기와 아동기로 나누어져 있고, 아동기의 기록이 정확해야 신뢰도가 높아진다고 했다. 이미 확인을 넘어 ADHD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상태라는 것을 자각한 상태였기에 부모님께 전화까지 해 가면서 최대한 상세하고 정확하게 작성했다. 들뜬 자아 때문에 검사 결과가 오염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사실 검사지를 보고 크게 감흥이 들지는 않았다. '누구나 다 이러지 않나?' 하는 내용들이 절반이 넘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봐 오던 온갖 미디어물의 등장인물들 또한 대다수가 해당될 것이다. 아동기의 내용 또한 '애들이 다 그렇죠 뭘' 하는 수준의 내용들로만 가득 차 있었기에 정말 이런 걸로 ADHD 판별이 가능한가 싶기도 했다. 오히려 어릴 때부터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 대체로 널리 알려진 과행동들(TPO 모르고 떠들기, 뛰어다니기, 과한 활동성 등)에 대한 내용은 전혀 체크할 것이 없었다.
의사의 조언대로 ADHD에 관한 유튜브 영상들도 여럿 찾아봤다. 그다지 확증이 되어 줄 만한 것은 없었다. 대부분이 검사지의 해설에 불과했고 호들갑 같았다. 등장인물들이 제대로 학위가 있는 정신과 의사들이긴 했지만 말하는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신뢰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 MBTI 성격별 특징과 궁합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다음 주에 정신과를 재방문하여 검사지를 제출하고, CAT 검사와 뇌파 검사를 진행했다. 나중에야 들었지만 이것들도 확진을 짓는 검사들은 아니고, 의사의 판단에 참고가 되는 검사사항들이라고 한다.(개인적으로는 의사가 제안한다면 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나는 CAT 검사를 하면서 나 자신의 문제를 바로 체감할 수 있었으므로) 결국에는 의사의 임상판단이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는 것 같다.
의사는 ADHD가 의심된다는 소견을 냈다. ADHD 자체가 맞다 아니다로 갈라지는 것이 아닌 스펙트럼성(증상의 경중이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며 나타나는 증세도 다양함)이라는 것도 이때 들었다. 의사가 이런저런 대표 증세들을 말하고 내가 공감하는 것이 몇 번 반복되었다. 이후 약물에 대한 설명을 듣고, 콘서타 18mg를 일주일간 복용하면서 상태를 보자는 평가가 내려졌다. 네이버 카페로 치면 준회원인 셈이었다. 정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약의 용량을 조절해 보며 가장 적합한 용량을 찾아야 했다.
그것이 어제의 일이다. 오늘부터 기록이 시작된다.
배경 / 계기 / 검진
2022. 10. 13. 19:39